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알렉산더 그로텐디크 (문단 편집) === 어린 시절 === [[파일:그로센딕 어릴적.jpg|width=40%]] || [[파일:schapirosacha03.jpg|width=150]] || [[파일:Hellelott.jpg|width=200]] || [[파일:grothendieck05.jpg|width=150]] || || 알렉산더 '사샤' 샤피로 || 젊은 시절의 요한나 '항카' 그로텐디크 || 56세의 항카 그로텐디크 || 독일 [[베를린]]에서 태어났으며, [[러시아]] 태생의 [[유대인]] 아버지 알렉산더 '사샤' 샤피로와 독일계 어머니 항카 그로텐디크 사이에서 태어났다.[* 위키백과에는 알렉산더 샤피로를 소개하는 영어, 독일어, 프랑스어, 러시아어, 우크라이나어 문서가 작성되어 있는데, 원래 러시아어 화자였으나 우크라이나 독립파 아나키스트로 활동했고 독일과 프랑스에서 살아간 폭풍 같은 인생사 때문인지 이름의 표기가 언어판마다 전부 다르다. 어머니의 경우 프랑스어, 카탈루냐어 위키백과 문서가 있다.] 아버지가 아닌 어머니의 성을 따랐는데, 이는 요하네스 라다츠(Johannes Raddatz)라는 저널리스트와 결혼했다가 머잖아 이혼한 후 알렉산더 샤피로와 다시 동거를 시작했지만 샤피로는 가명을 몇개씩 돌려쓰며[* 적백내전에서는 알렉산드르 타나로프라는 가명을 썼고, 이외에 사샤 표트르, 세르게이 등의 다른 가명도 썼다. 훗날 아우슈비츠에 끌려갈 때에는 알렉산드르 타나로프라는 이름으로 수감되어 사망했다. ] 지명수배를 피해 도피생활을 전전하는 유대인이었기 때문에 유대인 아이임을 숨기고자 독일 함부르크에 친정이 있는 어머니의 성을 따랐기 때문이다. 훗날 이 가족이 프랑스에서 생이별하던 과정을 생각하면 부모의 결정이 현대수학사를 바꿔놓은 셈이다. 그의 부모는 제각기 중산층 이상의 유복한 집안에서 자란 인텔리였지만 모두 타고난 계급적 특권을 내다버리고 세계 혁명에 투신한 [[사회주의자]]이자 [[아나키스트]]였다. 아버지는 과격 아나코 생디칼리스트로서 [[네스토르 마흐노]]의 혁명 동지였으며 시베리아 수용소에서 10년을 구르다 탈출 (또는 교전 과정에서 수류탄을 던지던) 중 한 팔을 잃은 후 독일로 망명해 가명을 돌려쓰며 거리 사진사로 활동하던 인물이었다. 엄마도 만만찮은 강성 투사라서 독일에서 나치에 맞서는 반체제 언론인으로 활동하였으며, [[스페인 내전]]이 터지자 먼저 국제여단으로 참전한 남편을 찾으러 간다고 자식들을 지인들에게 맡기고 스페인에 갔다가 남편과 함께 목숨 걸고 빠져나와 유대인 박해가 심해지기 직전 겨우 아이들을 되찾은 인물이었다. 이런 부모들의 기질은 알렉산더에게도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1933년~1934년에 부모가 [[파리(프랑스)|파리]]를 거쳐 스페인 내전에 참전한 후, 알렉산더는 [[함부르크]]에서 지인의 집[* 항카처럼 아나키즘, 사회주의에 관심이 많던 진보 지식인 빌헬름 하이도른(Wilhelm Heydorn) 목사 부부가 몇몇 고아들을 맡아 키우던 곳이었다. 어머니가 첫 결혼에서 낳은 누나(Frode Raddatz, 애칭 마이디 Maidi)는 동생과도 떨어져 장애인 복지시설에 맡겨졌다가 미국으로 탈출하여 1997년까지 생존했다.]에 머물며 자랐으며[* 이 때의 일화도 골때리는데, 항카는 다짜고짜 꼬맹이 아들을 맡기고 가는 주제에 우리는 무신론자니까 애한테 하느님 얘기는 입도 뻥끗 말고 머리카락도 절대 자르지 말라면서 신신당부를 했다(...). 그나마 학교 보내지 말고 목사님이 직접 가르치라는 말은 따르지 못하고 초등학교까지는 보냈다고. 더욱 황당하게도 알렉산더가 이 어린 시절의 기억을 행복한 시절로 여겼는지 전쟁 후에도 하이도른 목사 부부와 연락을 주고받았다고 한다. ], 이후 1939년부터는 독일의 유대인 박해가 심해지는 통에 11세의 나이로 홀로 기차에 올라 파리로 탈출[* 유대인 아이를 데리고 지내기가 위험해져 하이도른 목사 부부가 파리의 거처로 수 차례 편지를 보냈지만 스페인도 갔다오고 도피생활도 반복하며 부모와의 연락이 닿지 않아 함부르크 주재 프랑스 영사관을 통해 수소문해서야 겨우 아이 데려가라는 연락을 할 수 있었다.]했으나, 짧은 해후로부터 머지 않아 프랑스의 외국인 불순분자 색출이 시작된다. 당시 남프랑스에는 스페인 내전에서 [[프란시스코 프랑코]]의 파시스트 정권이 승리하며 탈출한 스페인 공화파 인사는 물론 전세계에서 몰려든 국제여단 잔존세력이나 좌파 지식인, 아나키스트 불법체류자들이 매우 많았는데, 이들은 프랑스 정부에 적발되면 반정부 성향의 외국인 불순분자들을 가두는 강제 수용소로 끌려가곤 했다. 사샤와 항카는 러시아계, 독일계 사회주의자이자 아나키스트로서 가명을 몇개씩 돌려 쓰며 도피 생활을 하거나 좌파 매체에 기고문을 쓰곤 했으니 프랑스가 불편히 여기던 프로파일에 딱 들어맞았다. 그러던 중 제3공화국이 무너지고 들어선 [[비시 프랑스]] 정부는 외국인 수용소의 유대인들을 순차적으로 나치 독일이 운영하는 절멸수용소로 넘겼는데, 사샤는 도피 중 마흐노주의 서적을 소지한 채로 게슈타포에게 체포되어 베르네(Vernet) 수용소에 수감되었다가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 절멸수용소]]로 끌려가 사망했다. 항카는 유대인이 아니었기 때문에 아우슈비츠행은 면했지만 아들과 함께 남프랑스의 외국인 강제 [[수용소]]를 전전하게 된다. 이들이 갇힌 리외크로 수용소(Camp de Rieucros)는 원래 여성만 가두는 수용소였으나 미성년 자녀를 둔 어머니들은 자녀와 함께 지낼 수 있었다. 여름에 덥고 겨울에 추운 열악한 자연환경이었지만, 다행히 프랑스의 외국인 수용소 중에서는 그나마 교도관들이 수감자들에게 덜 빡빡하게 대하는 곳이어서 일부 엄마들은 근처 프랑스인 마을에 아이들을 통학시킬 수도 있었다.[* 리외크로 수용소의 사진 기록을 검색해보면 나치 절멸수용소처럼 비위생적인 환경에서 빡빡머리로 줄무늬 죄수복을 입고 감시당하는 '평범한' 유대인 수용소와는 이질적인, 오히려 낭만주의 시대의 향수가 묻어나는 아나키스트 협동조합의 생활공동체(?) 같은 사진도 있다. 3공 및 비시 정부가 여성 수용소라고 경계를 늦춘 점도 있고, 적지 않은 수감자들이 스페인에서 피레네 산맥을 넘어오면서도 자식과 가족을 지켜내며 강한 동지애로 뭉칠 수 있던 혁명가들이라 결속력이 강했으며 인근 마을을 통한 레지스탕스 조직과의 연통 또한 가능했기 때문이다. 이들은 리외크로 수용소가 해산되고 프랑스와 유럽 각지의 과밀 수용소로 흩어지면서 아사, 학살, 자식과의 생이별 등 더 끔찍한 고생길을 걷게 된다. 오늘날 남아있는 리외크로 수용소에서는 이런 여성 혁명가들의 행적에 주목하는 페미니스트 운동가들을 중심으로 추모와 기념사업이 이뤄지고 있다. ] 그러나 나름대로 고등학교도 경험한 큰 아이[* Lycée는 15세부터 18세까지의 교육과정으로 대한민국으로 치면 고등학교에 해당하지만, 그로텐디크는 Lycée에는 잠깐 다녀본게 전부라 한국으로 치면 사실상 중학생 나이였다.]였음에도 프랑스어는 같이 수감된 어린 아이들보다도 서툰 마당에, 알렉산더는 프랑스어를 쓰는 프랑스인들이 절대다수를 차지하던 주변 마을에서의 적대적인 환경 속에서 나치의 프락치 취급이나 당하면서 겉도는 것은 물론 신체적 공격까지 받으며 극도로 어려운 생활을 했다. 언제는 눈이 뒤집혀서 히틀러를 죽여버리겠다고 대책없이 혼자 수용소를 탈출했다가 추위와 배고픔을 견디지 못하고 헤매다 붙잡혀 돌아오는 일도 잦았다.[* 하지만 알렉산더 그로텐디크 본인의 회고에 따르면 그냥 심심해서 맘대로 놀러 나갔다오는 거였다고 한다(...). ] 알렉산더는 늘 외톨이 신세로 대부분의 수감생활을 홀로 보냈는데, 훗날에는 그 때의 시간을 수용소 생활이 준 선물로 여겼다. '''고독한 시간은 다른 사람과 전혀 소통하지 않고도 생각을 만들고 개념을 이끌어내는 방법을 가르쳐주었다.''' 이때 겪은 경험들은 후의 그의 정치성향과 광기 어린 연구 등 생애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그로텐디크 모자가 지내던 리외크로 수용소가 1942년 해체되면서, 항카는 다시 아들로부터 떨어져 홀로 귀르(Gurs) 수용소로 이감되었다. 항카는 이감되면서 프랑스 중부 생테티엔 인근에 위치한 [[레지스탕스]] 조직의 거점이었던 르 샹봉-쉬르-리뇽(Le Chambon-sur-Lignon)이라는 산골마을로 아들을 보내는데 성공했다. 그로텐디크는 이 곳에서 외국인들에게도 호의적이던 레지스탕스 투사들의 보호[* 프랑스의 레지스탕스 조직에는 프랑스인뿐만 아니라 스페인 국제여단, 공화파 망명자 출신 혁명가들도 많았고, 이들의 자녀나 고아들도 이들 레지스탕스 조직의 보호를 받았다. 다만 레지스탕스가 숨어든 마을의 분위기를 독일군이나 프랑스의 파시스트 부역자들도 잘 알았기 때문에 이들이 유대인 단속 실적을 채우러 들이닥칠 때마다 유대인 아이들은 황급히 도망쳐 숨어야 했다. ] 속에 세베놀의 콜레주-리세 통합학교(Le Collège-Lycée Cévenol International)[* 반전주의 운동가들이 설립한 일종의 대안학교로, 그로텐디크가 다닐 때에는 콜레주(중학교) 과정만 운영되었다. 레지스탕스 투사들의 자녀나 유대인 아이들이 많이 다녔고, 21세기까지도 평화와 진보주의의 기치를 내건 특성화 교육으로 이름이 높았다. 평화주의자들의 국제학교답게 세계대전과 냉전 이후에도 콩고, 르완다, 체첸, 코소보 등 수많은 지역에서 피난 온 난민 어린이들이 어린 시절을 보냈으나, 안타깝게도 냉전기 이후 프랑스 교육부의 공교육 체계에 편입된 후 재정난이 심해지며 2014년을 끝으로 문을 닫고 말았다. ]에 다니면서 본격적으로 프랑스어를 익히고 [[바칼로레아]]에 합격했는데, 이때부터 수학적 재능이 본격적으로 나타났다. 다만 이 때에도 그로텐디크는 수학 교과서에 나오는 진부하고 반복적인 문제가 너무 싫어서 스스로 흥미로운 문제를 만들고 흥미를 느끼지 못하는 것은 완전히 무시해버리는 습관을 가졌다. 수학 교사가 자신의 참신한 증명을 제대로 읽어보지도 않고 무조건 틀린 것으로 간주하여 감점해버리는 권위주의적인 교육 행태[* 교사들도 다들 반전주의 평화운동가들이니 사상적으로 권위주의적인 것까진 아니었으나, 수학자로서 수학을 연구하는 역량과 교육자로서의 역량은 다른 문제이다. 당대의 프랑스 수학 교과서는 [[니콜라 부르바키]]가 크게 문제시하던 대학 교과서뿐만 아니라 중고교 수학 교과서도 질적으로 좋은 편은 아니었거니와, 전쟁통에 말도 잘 안 통하는 다양한 연령대, 다양한 국적의 아이들을 데리고 간신히 운영하는 대안학교 수학 교사의 학술적 역량에 대해 대단한 것을 바랄 수는 없지 않은가. 대한민국에서만 봐도 [[전국교직원노동조합]]에서 활동하는 수학 교사들이 대단히 참신하고 독창적이고 우수한 교육을 행하지는 않으며, 반대로 보수성향의 수학 교사들이 유별나게 권위주의적으로 가르치지도 않는다. ~~의지나 사상 따위와는 전혀 상관없다. 선생님들의 수학머리는 임용시험 합격자 발표 직후부터 깨끗해져 있다.~~ ]도 성에 차지 않았다. 허나 무엇보다도 수학 교과서에서 길이·넓이·부피의 정의를 제대로 내리지 않는 데에 특히 불만이 컸는데, 이 사고를 발전시켜 [[르베그 측도]]론을 기존의 증명 자료 없이 혼자 힘으로 도출해내기도 하였다. 대학에 와서야 그것이 르베그가 다 정립해놓은 이론이라는 것을 알았다고 한다.[* 대한민국 고등학교 수학의 수준에서 간단한 설명을 덧붙인다. 보통 길이, 넓이, 부피를 구하기 위해 동원하는 것이 적분법이며, 고등학교 수학에서 배우는 적분법인 구분구적법보다 일반적인 방식으로 엄밀하게 정의하는 것이 바로 [[베른하르트 리만]]의 이름을 딴 리만 적분법으로 이는 대학교 수학과 1~2학년생들이 배우는 [[해석학(수학)|해석학개론]] 커리큘럼의 일부이다. 그런데 이 리만 적분조차도 충분히 일반적이지가 않아서, 실수를 자세히 파고들다보면 우리의 직관을 상당히 거스르는 의아한 결과와 반례를 마주하게 된다. 그나마 이상적분, 특이적분이라는 적분의 차력쇼(?)를 하다가 결국에는 [[디리클레 함수]] 같은 반례를 마주하면서는 리만 적분이라는 다소 직관적인 방법만으로는 적분을 할 수 없다는 문제의식에 이르게 되는데, 이에 앙리-레옹 르베그의 아이디어에서 출발한 '[[측도]]'라는 개념을 도입함으로써 리만 적분이 잘 정의되지 않는 경우에도 적분을 잘 정의할 수 있게끔 자연스럽게 일반화한 적분법이 등장하니 그것이 바로 르베그 적분론이다. 문제는 여기까지 사고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공리적 집합론과 미분적분학의 엄밀한 이해와 함수공간 등에 관한 넓고 깊은 이해가 선행되어야 한다는 점인데, 그 넓고 깊은 이해라는 것이 사실상 수학과 전공과목인 집합론과 해석학개론의 엄밀하고 깐깐하고 피곤하고 장대한 빌드업의 전 과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르베그 측도론을 본격적으로 학습하는 커리큘럼은, 전공기초과목인 해석학개론 과정을 마친 학부 고학년 내지 석사과정 대학원생들을 위한 [[실해석학]]이라는 전공심화과목에 해당하며, 여기에 [[선형대수학]], [[현대대수학]], [[위상수학]] 등을 끼얹은 ~~혼종~~ 연구분야가 바로 그로텐디크의 첫 전공인 [[함수해석학]]이다. 좋아하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안 하던 그로텐디크의 오타쿠적 학습 습관과 사고력은 10대의 나이에 대학원 과정에 버금가는 사고를 독자적으로 창안해내는 경지에 이르렀던 것이다.]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에는 어머니와 함께 몽펠리에에 정착하여 [[몽펠리에 대학교]][* 그러나 당시 몽펠리에 대학은 파리의 대학들에 비해 교육적으로 낙후된 곳이었다. 밑에 언급할 [[앙드레 베유]], [[장피에르 세르]], 앙리 카르탕 등은 모두 '''[[그랑제콜]]'''인 [[파리 고등사범학교]](ENS) 출신 수학자들이다. 그로텐디크는 당대의 프랑스 일류 수학자들 중에서는 보기 드문 일반대학 출신 수학자인데, 이는 "무국적자"라는 낙인과 함께 초창기 그가 뛰어난 연구이력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대학에서 쉬이 취직하지 못했던 이유 중 하나였다. 예나 지금이나 그랑제콜 입시를 위한 프레파 과정은 대한민국의 일류 재수학원 이상으로 부모님의 많은 지원이 필요한 과정이었기에 법적으로 프랑스인도 아니었던 그로텐디크 모자의 불우한 가정환경에서는 이를 감당해낼 수가 없었다. ]에서 공부했으며, 이 때 그의 수학적 능력[* 하지만 이 때에도 천문학 등 일부 재미없어하던 과목들에서는 저조한 성적을 기록하기도 했다.]에 주목한 교수들의 추천으로 프랑스 파리의 [[파리 고등사범학교]]로 가게 된다. 몽펠리에 재학 당시 그는 미적분을 가르친 술라(Soula) 교수에게 수학계에서 일어난 발견에 대해 물어보았는데, “수학 분야에 남아있던 마지막 공개 문제들은 르베그라는 사람이 모두 풀었다”는 대답을 들었다. 이것은 사실이 아니었고, 그는 이 말에 전혀 낙담하지 않았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